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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강북의 역사 - 조선시대

by 핑거프린스 2025.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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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의 「강남개발과 강북의 탄생과정 고찰」이라는 논문을 읽고,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한 내용이다.

이 논문은 강남과 강북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 오래전부터 서울이 어떻게 나뉘고 변해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조선시대의 서울, 그리고 ‘도성’과 ‘성저십리’로 구분되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조선시대의 서울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

‘도성’이라는 성곽 안쪽과, 그 밖으로 둘러싼 ‘성저십리’라는 두 겹의 구역이 있었다.

성곽은 단순히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어선이 아니라, 안과 밖 사람들을 구분하는 선이기도 했다.

 

사대문 안쪽, 이른바 ‘문안’에는 왕과 관리, 그리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살았다.

사대문이라고 하면 우리가 아는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을 말한다.

반대로 사대문 밖, ‘문밖’은 중심부에서 떨어진 지역으로, 농사짓는 땅과 마을이 있는 생활권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의 도심과 외곽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도성 안에도 또 하나의 경계가 있었다.

바로 청계천이다. 청계천 북쪽의 햇볕 잘 드는 언덕, ‘북촌’에는 사대부들이 살았고,

남쪽 ‘남촌’에는 몰락한 양반이나 상민들이 살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계층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동네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청계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신분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오늘날 '한강 입지가 최고' 라고 한다면, 조선시대에 우리 조상님들은 '청계천 입지 최고!' 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한양도

 

성곽 밖 성저십리는 조금 달랐다. ‘성곽에서 십리까지’라는 기준은 있었지만,

실제 경계는 강이나 산, 고개 같은 자연 지형이 정했다.

북쪽은 보현봉과 아미산, 동쪽은 우이천과 중랑천, 남쪽은 한강, 서쪽은 망원정 부근의 강변이 경계였다.

성저십리는 지금의 그린벨트처럼 도시를 둘러싼 완충지대였고, 도성과 농촌이 맞닿는 완충 역할을 했다.

 

500년 동안 이런 경계와 질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문안과 문밖, 북촌과 남촌, 성저십리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하루를 보냈고,

그 차이가 모여 서울이라는 도시의 성격을 만들었다.

 

이번 이야기는 ‘강남, 강북의 역사’라는 큰 틀 안에 있지만, 아직 강남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시대의 서울은 한강 이남 땅, 지금의 강남 지역을 서울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한강은 도시의 끝이었고, 그 너머는 다른 고을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런 질서가 오랫동안 유지되던 서울도 일제강점기를 맞으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도시의 경계가 새로 그려지고, 중심이 이동하며, 한강 건너편의 땅이 서울의 지도 속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바로 그 변화의 시작, 일제시대의 서울을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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